마케터의 일
30 June, 2020 - book - 4 min read
마케터의 일
현 시점 국내 기업 중 가장 핫한 마케팅을 하는 '배달의 민족'. 그곳의 CBO 장인성 님의 책이다. 저자는, 책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책은 어떤 IT서비스 회사에서 마케터들이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이야기이자 마케터 장인성의 개인적 경험에 기반한 본격 '저는 이렇던데요' 이야기 묶음집입니다. 어쩌면 이 책의 숨은 제목은 '마케터 장인성의 일'인지도 모릅니다. 처음에는 함께 일하는 주니어 마케터들에게 제 잔소리이자 경험자산을 나눠주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데 쓰다 보니, 같이 일하는 마케터들뿐 아니라 옆 회사, 다른 회사, 경쟁사의 마케터들에게도 읽을 만한 글이 될 수 있겠다는 용감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씁니다. 마케터의 일"
비록 내가 지금은 백수(또는 전업 집사)로 하루하루 즐겁게(?) 지내는 중이긴 하지만(*이 포스팅을 작성하던 당시에는 백수였으나 2020년 8월 이후로는 아니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는 마케터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의 명함에 적혀있던 직함이 마케터'였다. 당시의 나는 마케팅에 대한 공부는 커녕 관심조차 없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마케팅대행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관심도 없는 일은 왜 했나 싶기도 하지만, 아마 조급했던 것 같다. 20대 중반,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하고, 전공을 살려 1년 정도 일을 해봤지만 이 길은 아니다 싶었다. 그렇다고 다른 일을 해보자니 막막하여 국비지원으로 편집디자인을 배우며 어설픈 포트폴리오를 만들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포트폴리오를 첨부하여 취업포탈사이트 몇 군데에 이력서를 등록했었는데 이를 본 마케팅대행사에서 먼저 연락이 온 것이었다. 근데 재밌는 것은, 당연히 디자이너로 뽑힌 줄 알았는데 마케터로 뽑았다는 점이다. 마케터가 무엇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지만 앞서 말했듯 나는 조급했기에 어떤 이유였든 단지 나를 뽑아주었다는 그 호의를 고맙게 받았다.
내게 주어진 일들은 상당히 다양했다. 블로그에 장문의 글을 쓰거나 매월 콘텐츠 스케쥴을 짜기도 하고, 프로모션에 쓰일 포스터를 디자인 하기도 하고, 행사를 준비하기도 했으며, 인터뷰 질문을 구상하기도 하고, 제품이나 인물 사진을 찍기도 하고, 심지어 일본어나 영어로 된 원문을 번역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모두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일을 했다. 기본적으로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있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무척 재미있게 일을 했었다. 3년차까지는.
자칫 3개월로 끝날 수 있었을 수습직원은 정직원이 되고, 주임이 되고, 3년차 쯤에는 대리가 되었다. 그렇다. 직장인들이 권태기라 부르는 '마의 3년차'였다. 나 역시 마의 3년차를 피할 수 없었는데, 당시 내 나이가 29살이라는 점도 큰 기여를 했던 것 같다. 단순히 일이 재미 없다기 보다는 목표의 부재와 미래에 대한 불안함. 뭐 그런 복합적인 상황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마케터의 일'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느꼈던 불안함이었던 것 같다. 막 성장하는 스타트업이었고, '이것이 마케터의 일이다!'라며 확신을 주는 백전노장 같은 사수가 없었다.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대부분의 일들이 처음이었다. 그런 배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이었다.
'내가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여기에 과연 전문성이 있는 걸까?'
'굳이 내가 아니어도 누구나 심지어 갓 입사한 신입이라도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생각이 많고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 놓였을 때 즉시 그만 두고 다른 길을 가거나 확신을 갖고 초심으로 돌아갈 것이다. 반면에 생각이 많고 우유부단한 사람은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고민만 지속할 뿐 이렇다 할만한 행동을 취하지 못 한다. 안타깝게도 난 후자였다. 물론 경우에 따라 신중함이라는 좋은 말로 포장할 수도 있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나의 고민은 너무 길었다. 결국 답을 얻지 못한채 껍데기 뿐인 마케터로 지냈으며, 해가 넘어가기 직전에서야 퇴사를 결심했다.
서론부터 지지부진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길게 늘어놨는데, 그나마 글로 적어서 이 정도다. 내가 체감한 고민의 시간은 '내가 지금 시간과 정신의 방에 갇힌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길었다. 그리고, 100% 내 경험담인 이 이야기가 '마케터의 일' 도입부에 등장한다. 물론 저자와 일면식도 없으니 내 사례를 가져가 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놓였던 상황, 내가 했던 고민들과 놀랍도록 닮았다. 나는 허탈감과 동시에 개운함을 느꼈다. 내가 특수한 상황에 놓인 것도 아니었고, 내 고민이 이상한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아, 좀 더 일찍 읽었더라면......
마케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그저 다양한 경험에 즐거워하고, 새로운 경험에 설레던 20대의 나. 마찬가지로 마케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해하고 고민하던 30대의 나. 이제야 알았다. 내가 했던 모든 일이 마케터의 일이었다. 물론, 개발자가 되기로 한 지금의 내 결심에 후회는 없다. 다만, 목적도 없이 보냈다며 아쉽게 느꼈던 긴 시간이 스스로의 자각이 없었을 뿐, 마케터로서의 소임을 다했다는 것에 깊은 위안이 된다. 머지않은 미래에 내가 개발자가 된다면, 마케터의 고민을 이해하는 개발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소한 희망도 품어 본다.